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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asishchev M-4-2 Bison 본문

항공/공중 급유기

Myasishchev M-4-2 Bison

lightbulb4999 2023. 3. 19. 14:00

출처: GlobalSecurity.org

M-4-2 공중 급유기는 미국을 충격에 빠트린 M-4 폭격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M-4 폭격기는 1955년 5월 1일, 소련의 노동절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서방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대륙간 폭격기를 개발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폭격기를 60대나 공개하면서 언론은 황급히 미국과 소련 사이에 엄청난 폭격기 격차(bomber gap)가 생겼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소련은 10대의 폭격기를 6번 원형 비행하게 하여 60대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었으며 M-4 폭격기의 항속거리가 당초 설계한 것보다 부족하여 미 본토를 폭격하기에는 부족했다.

 

이런 사실은 소련이 그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으므로 소련은 곧바로 M-4 폭격기 개량형 개발에 착수했다. 항속거리를 늘리는 것이 핵심이었으므로 개량 작업은 경량화와 연비 향상에 초점을 두었다. 엔진은 기존 AM-3 터보제트 엔진에서 보다 우수한 연비를 가진 RD-7으로 교체되었고, 중앙 동체를 재설계하여 더욱 가볍게 더욱 공기역학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중량을 줄이기 위해 5개의 방어용 기총도 3개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중 급유 장치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개선 사항이 반영된 M-4(2M)은 드디어 12,000 km에 달하는 항속거리를 가지게 되어 'M-6(3M) Bison-B'이라고 불리며 1955년에 등장하여 1956년 3월 27일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

 

이때 공중 급유는 이미 생산되어버린 M-4 Bison-A를 공중 급유기로 개조한 M-4-2가 맡기로 했다. 신형 폭격기 Bison-B가 나온 상황에서 본연의 폭격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항속거리가 부족해 애매해진 Bison-A에게 공중 급유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 셈이었다. 소련은 1954년 5월에 공중 급유기 개발에 대한 소요를 제기하여 1956년부터 1년 동안 10대의 M-4 폭격기를 공중 급유기로 개조하였다. 이들은 폭탄 수납창에 폭탄 대신 3,600 리터의 연료 탱크와 급유 장치를 탑재했다. 따라서 M-4-2 공중 급유기는 폭탄창에 있는 연료탱크와 급유 장치를 탈거하면 언제든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후 1957년 2월 8일에는 M-4-2로부터 두 차례의 공중 급유를 받은 3M 폭격기가 17시간 동안 14,500 km를 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련의 개량과 공중 급유기를 붙여도 3M Bison-B는 소련 공군의 요구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미야시세프 설계국은 1963년까지 100대가 채 되지 않는 93대의 Bison 계열 폭격기를 생산했고, 미야시셰프 설계국 자체도 얼마 못 가 해체되었다.

 

대신, 소련 해군 항공대에서 Bison 폭격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해군 항공대는 3M 폭격기가 워싱턴 D.C. 를 타격하기에는 부족했지만 해상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충분한 항속거리를 가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항공모함 함대에 대응하여 공대함 미사일 발사 플랫폼으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3M 폭격기들은 폭격이 아닌 공대함 미사일 발사 플랫폼 또는 해상 초계기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때 소련 해군 항공대는 Bison-B와 별개로 임무 수행을 위해 탐색 레이더를 탑재한 3MD Bison-C 9대를 도입하여 공대함 미사일 발사 플랫폼으로 운용했다. 참고로, 1960년에 제작된 9대의 Bison-C는 미야시셰프 설계국이 생산한 마지막 Bison 계열 폭격기이다. 

 

무엇보다 1960년대부터 소련은 1957년 10월 4일에 발사된 스푸트니크를 계기로 폭격기보다 미사일 개발에 힘을 쏟았다. 미국보다 경제력이나 기술력이 부족해 폭격기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소련 입장에서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은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이자 강력한 체제 선전 수단이었다. 그리고 폭격기로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둘러싸인 미 본토에 핵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촘촘한 방공망과 요격기를 따돌린 다음 핵폭탄을 투하하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이는 미사일보다 매우 비효율적임을 소련도 잘 알고 있었다. 이후로 소련은 1961년에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고 1965년에는 레오노프 중령이 우주 유영에 성공하면서 우주경쟁(space race)에서 미국을 앞지르게 되었다. 그동안 폭격기 개발이 소홀히 된 것은 아니나 1960년대에 개발된 폭격기들은 미사일보다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대부분 실망적인 성능을 보여줄 뿐이었다.

 

1969년 미국의 달 착륙으로 종결된 우주 경쟁 끝에는 두 차례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1972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를 포함하여 핵투발 수단을 제한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3M 폭격기들은 3MS-2 또는 3MN-2라는 이름의 공중 급유기로 개조되었다. (3M 뒤에 붙은 S는 오래되었음을 의미하는 '스따르예(Starye)'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RD-7 엔진을 탑재할 예정이었으나 부득이하게 RD-3M 엔진을 탑재한 점에서 착안해 오래된 3M이라는 뜻을 가진다. N은 반대로 새롭다는 의미를 가진 '노브예(Novye)'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원래 탑재되기로 한 RD-7 엔진이 탑재된 기종이다.) 3MS-2와 3MN-2는 기존에 활동 중이었던 M-4-2를 대체하였고, M-4-2와 달리 폭탄창에서 공중 급유 장치를 제거할 수 없었다. 이는 소련의 폭격기 수를 제한하기 위해 SALT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이들은 1994년까지 공중 급유기로 활동했는데 1980년대 말에 본격적인 공중 급유기라 할 수 있는 Il-78 Midas의 등장으로 퇴역하게 됐다.

 


Bomber gap

1950년대 초 CIA는 록히드에 소련을 정찰할 수 있는 비행기 개발을 의뢰했고 그 결과 전설적인 고고도 정찰기 U-2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CIA는 미 공군과 함께 1956년부터 소련 영공으로 침투하여 정찰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이 U-2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갖춰져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하며 위험도가 높은 곳을 위주로 첫 임무 루트를 설정했고 그렇게 이뤄진 1956년 7월 9일 첫 임무에서 U-2는 레닌그라드 활주로에 주기되어 있는 30대의 M-4 폭격기가 담긴 사진을 가져왔다. 정보 당국은 이 사진을 바탕으로 소련 내 모든 기지에 이 정도의 폭격기가 있거나, 또는 배치할 예정이라 생각하며 소련의 폭격기 전력 및 생산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일례로 CIA는 소련이 1960년까지 800여 대의 폭격기를 생산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과 소련의 폭격기 격차라고 하여 흔히 폭격기 격차(bomber gap)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U-2는 소련 비행장 곳곳을 정찰했는데 M-4 폭격기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CIA가 소련에 심어둔 정보원들로부터도 폭격기 생산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1958년에는 소련의 M-4 폭격기 관련 계획들이 속도가 붙기는 커녕 서서히 축소되고 있다는 보고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미 공군은 여전히 소련의 야욕에 의심을 품고 이들이 다른 곳에서 비밀리에 폭격기를 개발하고 배치하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소련이 쿠이비셰프(Kuybyshev), 카잔(Kazan) 그리고 이르쿠츠크에서 폭격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생산된 폭격기는 우크라이나의 빌라체르크바(Bila Tserkva)와 오르샤(Orsha)로  보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정찰하지 못한 해당 장소들에 U-2를 침투시켰다.

 

1959년 12월 6일, 터키에서 이륙한 U-2는 카푸친야르(Kapustin Yar) 미사일 시험장과 소련의 폭격기들이 모여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Eagle-2 비행장 그리고 쿠이비셰프 폭격기 생산 공장을 촬영했다. 그리고 미 정보당국은 U-2가 담아온 사진을 통해 더 이상의 M-4 폭격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련의 폭격기 생산 능력을 과대평가했음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M-4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짧아 미 본토에 산재되어 있는 전략 목표물을 공격하기에 적절치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 이를 깨달았을 무렵 미국은 이미 소련에 맞서 2,000대의 B-47 폭격기와 750대의 B-52 폭격기를 생산한 터였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소련은 M-4를 공개함으로써 되려 미국을 자극해 자신들을 공격해 올 수 있는 폭격기 전력을 늘린 셈일지도 모른다.

 


Myasishchev M-4 Молот

Military Wiki Fandom

1949년에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은 1950년대에 들어서부터 장거리 대륙간 폭격기를 보유하고자 했다. 이미 미국은 1940년대 후반부터 B-47 제트 폭격기를 제작하여 실전 배치하는 중이었으며 영국도 Vickers Valiant 제트 폭격기를 공개한 상황이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왕복엔진 기반의 재래식 Tu-4 폭격기는 나날히 발전하는 제트 요격기를 따돌릴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소련은 투폴레프 설계국에게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제트 폭격기 개발을 의뢰했으나 투폴레프는 스탈린을 직접 만나 이를 거부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신, 투폴레프는 동축반전 로터를 가진 터보프롭 엔진을 탑재한 Tu-95 폭격기를 개발한다.) 그래서 신형 폭격기 개발은 1951년에 투폴레프의 제자였던 미야시세프에게 맡겨졌다.

 

그는 호기롭게 시속 900 km로 비행하며 12,000 km의 항속거리를 가진 폭격기를 개발하겠다고 당에 보고했고, 불과 6개월 만에 실물 크기의 모형을 제작했다. 그리고 24시간 3교대 작업으로 첫 번째 시제기를 불과 몇 개월만에 완성시켰다. 덕분에 소련의 신형 폭격기는 1953년 1월 20일에 초도비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형 폭격기에는 2.9 메가톤급 RDS-37  수소폭탄이 실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시험 비행으로부터 완성된 폭격기는 당초 계획했던 12,000 km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9,500 km가 최대 항속거리였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투폴레프가 개발한 Tu-95 폭격기가 15,000 km의 항속거리를 가진 점과 매우 대조되는 성능이었다. 특히, 소련 주변으로 동맹국들(터키, 파키스탄, 일본 등)을 여럿 세워둔 미국과 달리 소련은 미국 주변에 폭격을 마치고 자신의 폭격기를 받아줄 나라가 없었으므로 항속거리는 매우 중요했다.

 

참고로 캄차카 반도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직선거리가 6,000 km 정도이다. 미 본토 서부에 위치한 전략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왕복 12,000 km는 비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유럽(영국과 프랑스의 방공망)을 통과해서 갈 순 없으므로 아마 유일한 비행 경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캄차카 반도 외에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극동 공군기지에서 북극을 경유한다면 미 중부까지도 가능할지도 모르나, 확실한 점은 미 본토 타격을 위해 소련 폭격기는 폭탄과 함께 왕복 12,000 km는 비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M-4는 폭격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절치 않았다.

 

항속거리만이 문제가 아니였다. 조종 시스템은 결함을 일으키기 일쑤였고 비행기는 조종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게다가 온도 조절 시스템도 미흡해 파일럿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모피옷을 껴입어야 했다. 이미 1940년대 중반에 가압실을 적용하여 고고도에서도 쾌적한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B-29 폭격기 파일럿들과 사뭇 대조되었다. 그럼에도 초창기에 나왔던 M-4 Bison-A가 1954년에 개량을 승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폭탄 탑재량과 속도 때문이었다. Tu-95는 항속거리가 길었으며 터보프롭 엔진을 탑재한 항공기 중에서는 빠른 편에 속했지만 제트 폭격기보다 빠를 순 없었다. 폭장량도 있다. M-4는 25톤의 폭장량을 가져 15톤의 폭장량을 가진 Tu-95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큰 위력을 가진 폭탄을 실을 수 있었다. 덕분에 M-4 또는 2M이라고 불렸던 Bison-A는 다양한 개량을 거쳐 M-6 또는 3M으로 다시 태어났으나 위에서 다뤘듯이 얼마 못가 대부분의 기체가 공중 급유기로 전락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Myasishchev M-4

Wikipedia, Tupolev Tu-95

Wikipedia, Bomber gap

GlobalSecurity.org Myasishchev 3MS-2 Refueling Aircraft

소련의 들소라 불렸던 폭격기가 하늘의 주유소로 전락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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